과달루페의 성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과달루페의 성모는 1531년 멕시코에서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한 성모 마리아를 지칭하며, 멕시코와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숭배받는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의 지시로 주교에게 성당 건립을 요청하고, 틸마(망토)에 성모의 모습이 새겨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이 이야기는 17세기 문서인 '니칸 모포우아'에 기록되었으며, 멕시코 독립 전쟁에서 멕시코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 문화와 가톨릭 신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성지를 방문한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성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과달루페의 성모 | |
---|---|
기본 정보 | |
![]() | |
유형 | 성모의 발현 |
목격자 | 후안 디에고 후안 베르나르디노 |
승인 | 1895년 10월 12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정식 대관식 승인) |
공경 대상 | 가톨릭교회 성공회-가톨릭 교회 |
성지 |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 테페야크 언덕, 멕시코시티, 멕시코 |
상징 | 임신한 여성, 눈을 내리깔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손을 모으고, 검은색 띠가 있는 분홍색 튜닉 로브를 입고, 8개의 꼭짓점 별이 새겨진 청색 망토로 덮여 있으며, 어두워진 초승달 위에 서 있는 동안 타오르는 태양을 가리고, 케루빔 천사가 그녀의 옷자락을 들고 있음 |
수호 | 멕시코시티 (1737년) 누에바에스파냐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1754년) 폰세, 푸에르토리코 (1757년) 필리핀 (1935년 7월 16일) 라틴 아메리카 (1945년 10월 12일) 멕시코 및 아메리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2000년) 세부 (리카르도 추기경에 의해 2002년) |
다른 이름 | 아메리카의 여왕 라틴 아메리카의 수호 성녀 멕시코의 여왕 |
축일 | 12월 12일 |
날짜 | 1531년 12월 9일~12일 (율리우스력); 1531년 12월 19일~22일 (그레고리력) |
지리 정보 |
2. 발현
1531년 12월 9일, 멕시코 과달루페의 원주민 후안 디에고 앞에 성모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성모는 주교에게 성모의 대성당을 건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디에고는 병든 친척을 도우러 가려고 했기에, 말을 거는 성모를 뿌리치고 가려 했다. 그러자 성모는 그를 만류하며 친척의 회복을 알렸다. 디에고가 돌아왔을 때, 병들었던 친척은 치유되어 있었다. 성모는 주교에게 증표로 꽃을 가져가라고 말했고, 디에고는 꽃을 망토에 싸서 주교관으로 가져갔다. 주교관에 꽃을 전했을 때, 디에고의 망토에는 성모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후안 디에고는 2002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과달루페의 성모 발현 사건에 대한 가톨릭교회 측의 공식 설명과, 17세기 나와틀어로 쓰여진 Huei tlamahuiçoltica에 포함된 ''Nican Mopohua''의 기록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치하에서 후안 디에고의 시복 운동이 강화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비유럽권 가톨릭 신자와 성인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성인성성성은 후안 디에고를 "공경자"(1987년)로 선포했으며, 교황은 1990년 5월 6일 멕시코 시티의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에서 열린 미사에서 그를 "원주민의 보호자이자 옹호자"로 선언하며 그의 시복을 발표했고, 12월 9일을 축일로 정했다.[44]
당시 역사가들은 후안 디에고에 관한 증거의 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후안이 기적의 이미지를 전달했다고 전해지는 주교 후안 데 수마라가의 저술에는 그나 그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1556년의 교회 조사 기록에서도 그가 생략되었으며, 17세기 중반 이전의 문서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1996년 과달루페 대성당의 83세 수도원장 기예르모 슐렌부르크는 가톨릭 잡지 ''익서스''에 실린 인터뷰에서 후안 디에고가 "실제가 아닌 상징"이며 그의 시성식은 "숭배의 인정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혐의로 사임해야 했다.[45] 1883년, 수마라가의 역사가이자 전기 작가인 호아킨 가르시아 이카스발세타는 주교 라바스티다를 위한 과달루페 성모에 대한 기밀 보고서에서 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지지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는 후안 디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46]
1995년, 4권짜리 과달루페 백과사전을 막 출판한 예수회 신부 하비에르 에스칼라다는 환상의 그림 설명과 후안 디에고의 생애와 죽음에 관한 나후아틀어 표기가 담긴 양피지(''에스칼라다 코덱스''로 알려짐)의 존재를 발표했다.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 문서는 15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안토니오 발레리아노와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의 서명을 담고 있었고, 그 내용은 사실로 여겨진다. 그 코덱스는 1997년에 출판된 과달루페 백과사전의 부록으로 다루어졌다.[1] 일부 학자들은 확신하지 못하며, 한 학자는 코덱스의 발견을 "마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성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 그림을 성 루가가 그리고 성 베드로가 서명한 것과 같다"고 묘사했다.
2. 1. 발현 보고
1531년 12월 9일 이른 아침, 후안 디에고가 미사에 참석하려고 테페약 언덕을 넘고 있을 때, 푸른 망토를 입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성당을 세울 것을 요청했다.[4] 후안 디에고는 이 메시지를 후안 데 수마라가 주교에게 전했으나, 주교는 믿지 않고 증표를 요구했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 마리아를 다시 만나 하소연했고, 성모 마리아는 테페약 언덕에서 카스티야산 장미꽃을 모아 가져오라고 했다. 당시 겨울이었고 테페약 언덕은 꽃이 필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후안 디에고는 장미꽃이 만발한 것을 발견했다.[4]성모 마리아는 장미꽃들을 후안 디에고의 틸마(인디언의 겉옷, 망토)에 정리해 주었고, 후안 디에고가 주교 앞에서 틸마를 펼치자 장미꽃들이 흩뿌려지면서 틸마에 과달루페의 성모 형상이 나타나는 기적이 일어났다.[4] 수마라가 주교는 즉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바쳤다.
17세기에 나와틀어로 쓰여진 ''Huei tlamahuiçoltica''에 포함된 ''Nican Mopohua''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는 후안 디에고에게 네 번, 그의 삼촌인 후안 베르나르디노에게 한 번 나타났다.[4] 첫 번째 발현은 1531년 12월 9일 토요일 아침(현재 사용되는 그레고리력의 12월 19일)에 일어났다. 후안 디에고는 테페약 언덕에서 젊은 여인의 환시를 경험했다.[4]
그 여인은 후안 디에고에게 나와틀어로 자신을 마리아, "참된 신의 어머니"라고 밝히고,[5] 그 장소에 교회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다.[4] 후안 디에고는 멕시코 시티 대주교인 후안 데 수마라가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대주교는 믿지 않았다. 같은 날 늦게 후안 디에고는 성모 마리아를 다시 만났고(두 번째 발현), 성모 마리아는 그에게 계속 주장하라고 요청했다.[4]
다음 날인 1531년 12월 10일 일요일, 후안 디에고는 두 번째로 대주교에게 이야기했고, 대주교는 그에게 진정으로 받아들일 만한 기적적인 징표를 요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날 늦게, 후안 디에고가 테페약으로 돌아갔을 때 세 번째 발현이 나타났다. 성모 마리아는 다음 날(12월 11일) 징표를 제공하기로 동의했다.[6]
그러나 12월 11일 월요일, 후안 디에고의 삼촌이 병이 났고, 12월 12일 화요일 이른 시간에 후안 베르나르디노의 상태가 악화되자 후안 디에고는 틀라텔롤코로 가서 가톨릭 신부를 찾았다.[4]
성모에게 지체되는 것을 피하고 약속한 월요일에 그녀를 만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후안 디에고는 테페약 언덕 주변의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성모는 그를 가로막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네 번째 발현). 후안 디에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고, 성모는 "¿No estoy yo aquí que soy tu madre?" ("나는 네 어머니인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라며 그를 위로했다. 그녀는 후안 베르나르디노가 회복되었음을 확신시키고, 테페약 언덕 꼭대기에서 꽃을 모으라고 말했다. 후안 디에고는 카스티야 장미가 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4]
성모는 꽃을 후안 디에고의 ''틸마틀리''에 정리했고, 후안 디에고가 대주교 앞에서 망토를 열었을 때, 꽃이 바닥에 떨어졌고 천에 성모의 모습이 드러났다.[4]
다음 날인 12월 13일, 후안 디에고는 삼촌이 완전히 회복된 것을 발견했고, 후안 베르나르디노는 성모를 보았다고 말했다(다섯 번째 발현). 그녀는 그에게 이 발현과 그의 기적적인 치유에 대해 대주교에게 알리라고 지시했고, 그녀가 "과달루페"라는 칭호로 알려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4]
대주교는 후안 디에고의 망토를 개인 예배당에 보관한 후 교회에 공개 전시했다. 1531년 12월 26일, 기적적인 이미지를 테페약 언덕으로 옮기기 위해 행렬이 형성되었고, 그곳에 급하게 세워진 작은 예배당에 설치되었다.[7] 이 행렬 동안, 원주민이 화살에 목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으나, 성모의 형상 앞에서 생명을 간청하자 즉시 회복되는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8]
2. 2. 발현에 대한 묘사
1531년 12월 9일 이른 아침, 후안 디에고가 미사에 참석하려고 테페약 언덕을 넘고 있었을 때, 신비롭고 찬란한 빛을 내는 구름 속에 푸른 망토를 입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4] 성모 마리아는 후안에게 나후아틀어로 "나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자신이 발현한 장소에 성당을 세워 자신을 공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5]후안 디에고는 이 메시지를 후안 데 수마라가 주교에게 전했으나, 주교는 믿지 않고 기적의 증표를 요구하였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 마리아를 다시 만나 하소연하였고, 성모 마리아는 테페약 언덕 정상에서 (주교의 고향인) 카스티야산 장미꽃을 모아 가져오라고 하였다. 당시 계절은 겨울이었고, 테페약 언덕은 꽃이 필 수 없는 험한 바위 언덕이었지만, 후안 디에고는 그곳에서 장미꽃들이 만발한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틸마(인디언의 겉옷, 망토)에 싸서 성모 마리아에게 가져갔다.
성모 마리아는 장미꽃들을 후안 디에고의 틸마에 가지런히 놓아준 뒤, 주교에게 이 꽃들을 가져가 자신의 소망을 전하라고 하였다. 후안 디에고가 수마라가 주교에게 틸마를 펼쳐 장미꽃들을 보여주자, 장미꽃들이 흩뿌려지면서 과달루페의 성모 형상이 틸마에 새겨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수마라가 주교는 틸마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바쳤다.[4]
나와틀어로 쓰여진 Huei tlamahuiçoltica에 포함된 ''Nican Mopohua''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는 후안 디에고에게 네 번, 그의 삼촌인 후안 베르나르디노에게 한 번 나타났다. 1531년 12월 9일, 후안 디에고는 테페약 언덕에서 젊은 여인의 환시를 경험했다.[4]
성모는 후안 디에고에게 그의 모국어인 나와틀어로 말하며, 자신을 마리아, "참된 신의 어머니"라고 밝혔다. 그녀는 그 장소에 그녀를 기리는 교회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다.[4][5]
후안 디에고는 멕시코 시티 대주교인 후안 데 수마라가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대주교는 믿지 않았다. 같은 날 후안 디에고는 성모를 다시 만났고(두 번째 발현), 성모는 그에게 계속 주장하라고 요청했다.[4]
다음 날인 1531년 12월 10일, 후안 디에고는 다시 대주교에게 이야기했고, 대주교는 징표를 요구했다. 그날 늦게 테페약에서 세 번째 발현이 나타났고, 성모는 다음 날(12월 11일) 징표를 제공하기로 했다.[6]
12월 11일, 후안 디에고의 삼촌이 병이 났고, 12월 12일 후안 디에고는 틀라텔롤코로 가서 가톨릭 신부를 찾았다.[4]

성모에게 지체되는 것을 피하고 약속한 월요일에 그녀를 만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후안 디에고는 테페약 언덕 주변의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성모는 그를 가로막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네 번째 발현). 후안 디에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고, 성모는 그가 그녀에게 의지하지 않은 것을 부드럽게 꾸짖었다. 과달루페 발현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자 과달루페 대성당 정문 위에 새겨진 그녀의 말은 "¿No estoy yo aquí que soy tu madre?" ("나는 네 어머니인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였다. 그녀는 후안 베르나르디노가 회복되었음을 확신시키고, 테페약 언덕 꼭대기에서 카스티야 장미를 모으라고 했다.[4]
성모는 꽃을 후안 디에고의 ''틸마틀리''에 정리했고, 후안 디에고가 대주교 수마라가 앞에서 망토를 열었을 때, 꽃이 바닥에 떨어졌고 천에 성모의 모습이 드러났다.[4]
다음 날인 12월 13일, 후안 디에고는 삼촌이 회복된 것을 발견했고, 후안 베르나르디노는 침대 곁에서 기도한 후 성모를 보았다고 말했다(다섯 번째 발현). 그녀는 그에게 이 발현과 그의 기적적인 치유에 대해 대주교에게 알리라고 지시했고, 그녀가 "과달루페"라는 칭호로 알려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4]
3. 역사
과달루페의 성모 발현과 관련된 역사는 여러 기록과 증언을 통해 전해진다. 1648년 멕시코시의 교구 사제 미겔 산체스는 ''과달루페의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미지''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는 멕시코에서 성모 발현과 이미지를 다룬 초기 기록 중 하나이다.[3]
16세기 중반에 제작된 에스칼라다 코덱스는 성모 발현과 후안 디에고의 모습을 기록한 양피지 문서로, 안토니오 발레리아노의 문자와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의 서명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1548년, 1531년에도 우리 사랑하는 어머니 과달루페의 성모가 멕시코에서 과틀라토아친에게 나타나셨다. 과틀라토아친은 훌륭하게 세상을 떠났다"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29]
1649년에는 루이스 라소 데 라 베가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위에이 틀라마우이촐티카''("위대한 사건")라는 36페이지 분량의 나와틀어 소책자가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니칸 모포우아''("여기에 기록되어 있다")라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안토니오 발레리아노가 1556년경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30][32][16][17]
1666년 학자 루이스 베세라 탕코는 과달루페의 성모 성역의 기적적인 기원es을 출판했고, 1675년 스페인에서 멕시코의 행복es으로 재출판되었다. 1688년에는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데 플로렌시아가 ''멕시코 북극성''을 출판하여 발현 역사를 기록했다.
1537년, 교황 바오로 3세는 회칙을 발표하여 인디오를 이성적인 인간으로 취급하고 박해를 금지했다.
1666년 멕시코 교회는 후안 디에고를 알고 있었다고 보고한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1723년에는 그의 생애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1754년, 성 의식성은 발현의 진실성과 유효성을 확인하고, 12월 12일에 과달루페 축일을 위한 미사와 예배를 거행하도록 허가했다.[37][38]
1709년에는 이미지를 보관하기 위한 새로운 가톨릭 바실리카 교회가 완공되었는데, 이는 현재 구 바실리카로 알려져 있다.[39]
1921년, 반가톨릭 세속주의자가 틸마 아래에 폭탄을 설치하여 폭발했지만, 틸마는 손상되지 않았다.[110]
가톨릭 교회는 과달루페의 성모 신앙이 기독교 이전의 아즈텍 여신 토난친|토난친nah 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127] 성모가 발현한 언덕은 본래 토난친 여신 신앙의 중심지였다.[128] 그러나 교회는 원주민들이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러한 종교적 공존을 어느 정도 허용했다.[129][130]
3. 1. 스페인 과달루페 기원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카세레스의 과달루페에 있는 과달루페 성모 성지는 중세 카스티야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성모 마리아 성지였다.[9] 이곳은 스페인에 있는 여러 흑인 마돈나 중 하나이며, 수많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곳에서 유래한 과달루페 마을의 산타 마리아 데 과달루페 수도원에서 숭배받고 있다.
"과달루페"라는 이름은 아랍어 "와디"(강)와 라틴어 "루푸스"(늑대)가 합쳐진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아랍어와 라틴어가 이런 식으로 결합될 가능성이 낮다고 보아, 검은 돌이 강바닥에 있는 강을 의미하는 아랍어 "와디-알-루브"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10]
이 성지에는 누가 복음사가가 조각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세비야의 레안데르 대주교에게 건네준 것으로 알려진 조각상이 있다. 지역 전설에 따르면, 712년 무어인이 세비야를 점령했을 때 한 무리의 사제들이 북쪽으로 도망쳐 과달루페 강 근처 언덕에 조각상을 묻었다고 한다.[11]
14세기 초, 성모 마리아는 어느 날 산에서 잃어버린 동물을 찾던 길 코데로라는 겸손한 카우보이에게 나타났다.[12] 코데로는 마리아가 자신에게 나타나 사제들에게 현현 장소를 파내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했다. 사제들은 발굴을 통해 숨겨진 조각상을 다시 발견하고 그 주변에 작은 성전을 지었는데, 이것이 웅장한 과달루페 수도원이 되었다.[11]
3. 2. 멕시코에서의 기원
17세기에 나와틀어로 쓰여진 Huei tlamahuiçoltica에 포함된 ''니칸 모포와''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는 치치메카 농부인 후안 디에고에게 네 번, 그의 삼촌인 후안 베르나르디노에게 한 번 나타났다.[4] 첫 번째 발현은 1531년 12월 9일 토요일 아침(율리우스력, 현재 사용되는 그레고리력의 12월 19일)에 일어났다. 후안 디에고는 나중에 멕시코 시티 외곽의 과달루페의 일부가 된 테페약 언덕이라는 곳에서 젊은 여인의 환시를 경험했다.[4]이야기에 따르면, 그 여인은 후안 디에고에게 그의 모국어이자 이전 아즈텍 제국의 언어인 나와틀어로 말하며, 자신을 마리아, "참된 신의 어머니"라고 밝혔다.[5] 그녀는 그 장소에 그녀를 기리는 교회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4]
그녀의 말에 따라 후안 디에고는 멕시코 시티 대주교인 후안 데 수마라가를 찾아가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예상대로 대주교는 디에고를 믿지 않았다. 같은 날 늦게 후안 디에고는 젊은 여인을 다시 보았고(두 번째 발현), 그녀는 그에게 계속 주장하라고 요청했다.[4]
다음 날인 1531년 12월 10일 일요일, 율리우스력으로 후안 디에고는 두 번째로 대주교에게 이야기했다. 대주교는 그에게 테페약으로 돌아가서 그 여인에게 그녀의 정체를 증명할 진정으로 받아들일 만한 기적적인 징표를 요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날 늦게, 후안 디에고가 테페약으로 돌아갔을 때 세 번째 발현이 나타났다. 같은 여인을 만난 그는 대주교가 징표를 요청했다는 것을 그녀에게 보고했고, 그녀는 다음 날(12월 11일) 징표를 제공하기로 동의했다.[6]
그러나 12월 11일 월요일, 후안 디에고의 삼촌이 병이 났고 그는 그를 돌봐야 했다. 12월 12일 화요일 이른 시간에 후안 베르나르디노의 상태가 악화되자 후안 디에고는 틀라텔롤코로 가서 후안 베르나르디노의 고해성사를 듣고 임종을 돌볼 가톨릭 신부를 찾았다.[4]
성모에게 지체되는 것을 피하고, 약속한 월요일에 그녀를 만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후안 디에고는 테페약 언덕 주변의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성모는 그를 가로막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네 번째 발현). 후안 디에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고, 성모는 그가 그녀에게 의지하지 않은 것을 부드럽게 꾸짖었다. 과달루페 발현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되었고 과달루페 대성당의 정문 위에 새겨진 그녀의 말은 "No nicān ca in moyetztzinōc, in motlāzohnantzin?nah" ("나는 네 어머니인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였다. 그녀는 후안 베르나르디노가 이제 회복되었음을 확신하고, 일반적으로 황량한 테페약 언덕 꼭대기에서 특히 12월의 추위 속에서 꽃을 모으라고 말했다. 후안 디에고는 그녀의 지시에 순종했고, 멕시코 원산이 아닌 카스티야 장미가 그곳에서 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4]
이야기에 따르면, 성모는 꽃을 후안 디에고의 ''틸마틀리'' 또는 망토에 정리했고, 후안 디에고가 나중에 대주교 수마라가 앞에서 망토를 열었을 때, 꽃이 바닥에 떨어졌고 천에 성모의 모습이 드러났다.[4]
다음 날인 12월 13일, 후안 디에고는 삼촌이 성모가 약속한 대로 완전히 회복된 것을 발견했고, 후안 베르나르디노는 그가 침대 곁에서 기도한 후 그녀를 보았다고 말했다(다섯 번째 발현). 그녀는 그에게 이 발현과 그의 기적적인 치유에 대해 대주교에게 알리라고 지시했고, 그녀가 "과달루페"라는 칭호로 알려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4]
대주교는 후안 디에고의 망토를 개인 예배당에 보관한 후 대중에게 공개 전시된 교회에 보관하여 큰 관심을 받았다. 1531년 12월 26일, 기적적인 이미지를 테페약 언덕으로 옮기기 위해 행렬이 형성되었고, 그곳에서 급하게 세워진 작은 예배당에 설치되었다.[7] 이 행렬 동안, 원주민이 성모를 기리기 위해 수행된 양식화된 무술 시연 중에 실수로 화살에 목을 치명적으로 맞았을 때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큰 고통 속에, 원주민들은 그를 성모의 형상 앞으로 데려가 그의 생명을 간청했다. 화살이 뽑히자 희생자는 완전히 즉시 회복되었다.[8]
1519년부터 1521년까지 아즈텍 제국에 대한 스페인 정복 이후, 마리아 신앙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전파되었고,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복음화를 위한 수단으로 기존의 종교적 신념과의 혼합주의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모의 기적적인 발현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으로 여겨지는 것은 1548년의 양피지 문서인 ''에스칼라다 코덱스''인데, 1995년에 발견되었으며 조사 분석 결과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3] 이 문서에는 후안 디에고와 발현에 대한 두 개의 그림 표현, 후안 디에고를 아즈텍 이름으로 지칭하는 여러 개의 나와틀어 비문, 그리고 그의 사망 연도인 1548년과 당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해인 1531년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안토니오 발레리아노의 상형 문자와 멕시코 은행 및 찰스 E. 디블의 전문가들이 인증한 프라이 베르나르디노 데 사하군(Fray Bernardino de Sahagun)의 서명이 포함되어 있다.[14] 역사가 알베르토 페랄타와 스태포드 풀은 이 문서의 진위 여부에 의문을 제기했다.

발현에 대한 보다 완전한 초기 묘사는 16페이지 분량의 필사본인 ''니칸 모포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1556년으로 정확하게 연대가 확인되었으며 1880년 뉴욕 공립 도서관에서 입수되었다. 이 문서는 나와틀어로 작성되었으며, 발현 이야기와 이미지의 초자연적인 기원을 담고 있다. 이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의해 교육받은 아즈텍 원주민 안토니오 발레리아노가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문서의 내용은 나중에 1649년에 널리 배포된 인쇄된 소책자에 포함되었다.[32][16][17]
이러한 문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16세기 후안 데 수마라가 대주교가 과달루페의 환상에 대해 쓴 기록은 알려져 있지 않다.[18] 특히, 이 환상에 대한 정경적인 기록은 후안 데 수마라가 대주교를 이야기의 주요 인물로 묘사하고 있지만, 수마라가는 다작의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현존하는 저작물에는 원주민의 이야기를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없다.[19]
문서 기록에 따르면 16세기 멕시코의 가톨릭 성직자들은 과달루페 성모의 이미지 주변에서 일어나는 원주민들의 신념의 정통성에 대해 깊이 분열되었으며, 프란치스코회 (당시 테페약 예배당을 관리)는 외부 집단에 강하게 반대했고, 도미니코회는 이를 지지했다.[20]
이 이야기를 주로 홍보한 사람은 도미니코회 출신인 알론소 데 몬투파르였는데, 그는 프란치스코회 출신 후안 데 수마라가에 이어 멕시코 대주교가 되었다. 몬투파르는 1556년 설교에서 테페약의 성모 마리아 예배당에 있는 천(틸마)에 그려진 그림에 대한 대중의 헌신을 칭찬하며, 그곳에서 특정 기적이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며칠 후, 프란치스코회 지역 책임자인 프라이 프란시스코 데 부스타만테는 원주민의 신념과 신자들을 비난하는 설교를 했다. 그는 가톨릭 대주교가 원주민 이미지를 미신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 예배당에서의 헌신은... 그들이 과달루페라고 부르는 곳으로, 이미지 자체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고 선교사들이 가르친 것과는 반대되는 행위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기 때문에 인디언들에게 해로웠습니다.

몬투파르 대주교는 이 문제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프란치스코회는 이미지가 우상 숭배와 미신을 조장한다는 입장을 반복했으며, 4명의 증인은 이미지가 인디언에 의해 그려졌다는 부스타만테의 진술에 대해 증언했고, 한 증인은 그를 "인디언 화가 마르코스"라고 지칭했다. 이는 당시 활동했던 아즈텍 화가 마르코스 시팍 데 아키노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21][22]
필립 세르나 칼라한(Philip Serna Callahan)이 1979년 적외선 사진을 사용하여 틸마를 검사한 것에 대해 조디 브랜트 스미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마르코스가 그렇게 했다면, 그는 분명히 예비 스케치 없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거의 기적적인 절차로 여겨졌습니다... 시팍은 천사의 그림이나 성모의 발 아래 있는 달과 같은 추가적인 부분을 그리는 데 관여했을 수 있습니다."[23]
결국 도미니코회 출신인 몬투파르 대주교는 프란치스코회의 성지 관리를 종료하기로 결정했다.[24] 그 이후부터 성지는 대주교의 권한 아래 교구 사제들에 의해 관리되고 봉사되었다.[25] 또한 몬투파르 대주교는 틸마가 나중에 설치되고 전시된 테페약에 훨씬 더 큰 교회를 건설하도록 승인했다.[26]
1570년대 후반, 프란치스코회 역사가 베르나르디노 데 사하군은 그의 저서인 ''누에바 에스파냐 사물의 일반 역사''(플로렌틴 코덱스라고도 알려짐)에서 테페약에서의 숭배와 "토난친"이라는 이름의 사용 또는 성모를 언급하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 [테페약]에는 [인디언]들이 신들의 어머니에게 헌정된 사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녀를 토난친, 즉 "우리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이 여신을 기리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과달루페 성모 교회가 세워졌고, 그들은 또한 그녀를 토난친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우리 성모, 하나님의 어머니를 토난친이라고 부르는 설교자들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토난친의 시작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는 처음 사용부터 이 단어가 고대 토난친을 지칭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어머니, 성 마리아의 [원주민] 이름 대신 토난친을 사용하는 것이 고쳐져야 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디스 인안친''(Dios inantzin)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이름, 토난친의 혼란 속에서 우상 숭배를 숨기려는 사탄의 발명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처럼 매우 먼 곳에서 방문하러 오는데, 이는 또한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곳에 우리 성모의 많은 교회가 있고 그들은 그곳에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날처럼 이 토난친에게 멀리 떨어진 땅에서 옵니다.[27]
사하군의 원주민 집단에 대한 비판은 주로 가톨릭 성모 마리아에게 원주민 이름 ''토난친''을 혼합주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한 그의 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하군은 1560년대 후반까지 자신의 설교에서 종종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28]
3. 3. 멕시코 최초 인쇄 기록
멕시코에서 처음 인쇄된 성모 발현과 이미지에 대한 기록 중 하나는 멕시코시의 교구 사제인 미겔 산체스가 1648년에 출판한 ''과달루페의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미지''이다.[3]16세기에 제작된 에스칼라다 코덱스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과 후안 디에고의 모습을 기록한 양피지 한 장으로, 안토니오 발레리아노의 문자를 프라이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이 서명한 것과 함께 재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1548년, 1531년에도 우리 사랑하는 어머니 과달루페의 성모가 멕시코에서 과틀라토아친에게 나타나셨다. 과틀라토아친은 훌륭하게 세상을 떠났다"라는 주석이 포함되어 있다.[29]
1649년에 출판된 36페이지 분량의 나우아틀어 소책자인 ''위에이 틀라마우이촐티카''( "위대한 사건")에는 ''니칸 모포우아''(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라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위에이 틀라마우이촐티카''의 구성과 저작자는 학자들 대부분이 1647년부터 1657년까지 테페약 성역의 사제였던 루이스 라소 데 라 베가에게 귀속시킨다.[30]
''니칸 모포우아''는 훨씬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1600년대 후반부터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교육을 받고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과 광범위하게 협력한 토착 아즈텍인인 안토니오 발레리아노(c. 1531–1605)에게 귀속되어 왔다.
현재 뉴욕 공립 도서관에 소장된 ''니칸 모포우아''의 필사본은 c. 1556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라소가 ''위에이 틀라마우이촐티카''를 만들 때 사용했던 발레리아노의 원본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권위자들은 날짜와 발레리아노의 저작에 동의한다.[32][16][17]
1666년 학자 루이스 베세라 탕코는 멕시코에서 발현의 역사를 다룬 책을 과달루페의 성모 성역의 기적적인 기원e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으며, 이 책은 1675년 스페인에서 멕시코의 행복es이라는 제목으로 재출판되었다. 1688년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데 플로렌시아는 같은 발현의 역사를 담은 ''멕시코 북극성''을 출판했다.
3. 4. 20세기
1921년 11월 14일, 반가톨릭 세속주의자가 꽃바구니 안에 폭탄을 숨겨 틸마 아래에 놓았다. 이 폭탄이 폭발하여 원본 이미지가 있는 바실리카의 제단이 훼손되었지만, 틸마는 손상되지 않았다. 폭발로 휜 놋쇠 십자가는 현재 성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신봉자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믿는다.[110]가톨릭 교회는 과달루페의 성모에 대한 신앙이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의 아즈텍 여신 토난친|토난친nah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127] 성모가 발현한 언덕은 본래 토난친 여신 신앙의 중심지였다.[128] 그러나 교회는 인디오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쉽게 하기 위해 이처럼 고래의 종교가 기독교와 공존하는 것을 어느 정도 허용했다.[129][130]
4. 성화
과달루페의 성모 성화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1648년 미겔 산체스는 자신의 소책자 《Imagen de la Virgen Maria》에서 성모화를 신약성서의 요한 묵시록 12장 1절에 나오는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660년, 마테오 데 라 크루즈는 “과달루페의 성모화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도상학적인 표현으로 드러내신 것이다.”라며 반론을 제기했고, 1738년 미구엘 피카초는 성모화가 원죄 없으신 잉태의 “최고의 표현”이라고 설교하였다.
원래 그림에는 성모의 머리에 12개의 점이 있는 왕관이 있었지만, 1887-88년에 사라졌다. 이는 1888년 2월 23일에 그림이 인근 교회로 옮겨지면서 처음 발견되었다. 한 화가가 임종 직전에 성직자의 지시로 왕관을 제거했다고 고백했는데, 금색 페인트가 왕관에서 벗겨져 낡아 보였기 때문일 수 있다. 역사가 데이비드 브래딩은 왕관을 제거한 이유가 이미지를 '현대화'하고 루르드 등에서 전시된 19세기 무염시태의 이미지와 유사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후 다른 왕관이 그림에 설치되었다. 1887년 2월 8일, 교황 레오 13세는 교황 칙서를 통해 1895년 10월 12일에 그림의 교황 대관을 허가했다.[41]
1979년, 미국의 과학자들은 적외선을 이용해 성화를 조사한 결과, 사람의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며 칠감이나 붓질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눈을 2,500배 확대했을 때 후안 디에고가 틸마를 펼쳤던 순간과 몇몇 인디언 가족들의 모습이 홍채와 동공에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눈은 즉석 사진기처럼 눈앞의 형상을 그대로 포착했다.”라고 밝혔다.[137]
과달루페의 성모화는 현재 과달루페의 성모 대성당 안에 걸려 있으며,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섬유조직, 형태, 색감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137]
4. 1. 성화 묘사
Nuestra Señora de Guadalupees에 새겨진 성모 마리아의 키는 1.45m이다. 피부색은 인디언처럼 거무스름한 황갈색이고 머리카락은 검은색이다. 목에 건 십자가 목걸이는 스페인 선교사들이 선교한 가톨릭 교회를 표시한다. 머리에서 발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외투는 밝은 청록색으로, 이 색은 거룩함을 뜻한다. 이 외투에는 세례와 새로운 생활을 상징하는 46개의 팔각의 별로 장식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는 금빛의 꽃무늬가 새겨진 엷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으며, 하얀 소매깃은 순교를 표시한다. 가슴 부근에 달린 검은색 리본은 토착민 전통에 의한 것으로 임산부를 의미한다.[134] 성모의 모습은 햇빛과 같은 금빛 광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형상은 마치 광선이 구름을 물리치는 듯하다. 악마를 상징하는 검은 초생달을 밟고 서 있는데, 그 밑에는 한 어린 천사가 성모의 옷자락을 떠받들고 있다. 성모의 얼굴은 아주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약간 홍조를 띤 두 볼과 아래를 내려다 보는 눈은 자비와 겸손을 드러내고 있다.[135][136]Nuestra Señora de Guadalupees는 흔히 우회적인 표현의 그림으로 해석된다. 1648년 소책자 《Imagen de la Virgen Mariaes》의 저자 미구엘 산체스는 Nuestra Señora de Guadalupees가 신약성서의 요한 묵시록 12장 1절에 나오는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로부터 12년 후, 마테오 데 라 크루즈는 “Nuestra Señora de Guadalupees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도상학적인 표현으로 드러내신 것이다.”라며 반론을 제기하였다. 1738년 미구엘 피카초는 Nuestra Señora de Guadalupees는 원죄 없으신 잉태의 “최고의 표현”이라고 설교하였다.
원래 그림에는 성모의 머리에 12개의 점이 있는 왕관이 있었지만, 1887-88년에 사라졌다. 이 변화는 1888년 2월 23일에 그림이 인근 교회로 옮겨지면서 처음 발견되었다. 결국 한 화가가 임종 직전에 한 성직자의 지시로 왕관을 제거했다고 고백했다. 이는 금색 페인트가 왕관에서 벗겨져 낡아 보이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데이비드 브래딩에 따르면, "왕관을 교체하지 않고 제거하기로 한 결정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미지를 '현대화'하고 루르드 등에서 전시된 19세기 무염시태의 이미지와 유사성을 강화하려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은 캔버스를 둘러싼 프레임이 성모의 머리 위 공간을 거의 남기지 않도록 조정되어 지워진 효과를 가렸다는 것이다."
다른 왕관이 그림에 설치되었다. 1887년 2월 8일, 교황 레오 13세의 교황 칙서는 1895년 10월 12일에 있었던 그림의 교황 대관을 허가했다.[41]
4. 2. 성화 분석
성화에 새겨진 성모 마리아의 키는 1m 45cm이다. 피부색은 인디언처럼 거무스름한 황갈색이고 머리카락은 검은색이다. 목에 건 십자가 목걸이는 스페인 선교사들이 선교한 가톨릭교회를 표시한다. 머리에서 발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외투는 밝은 청록색으로, 이 색은 거룩함을 뜻한다. 이 외투에는 세례와 새로운 생활을 상징하는 46개의 팔각의 별로 장식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는 금빛의 꽃무늬가 새겨진 엷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으며, 하얀 소매깃은 순교를 표시한다. 가슴 부근에 달린 검은색 리본은 토착민 전통에 의한 것으로 임산부를 의미한다.[134] 성모의 모습은 햇빛과 같은 금빛 광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형상은 마치 광선이 구름을 물리치는 듯하다. 악마를 상징하는 검은 초생달을 밟고 서 있는데, 그 밑에는 한 어린 천사가 성모의 옷자락을 떠받들고 있다. 성모의 얼굴은 아주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약간 홍조를 띤 두 볼과 아래를 내려다 보는 눈은 자비와 겸손을 드러내고 있다.[135][136]과달루페의 성모화는 흔히 우회적인 표현의 그림으로 해석된다. 1648년 소책자 《Imagen de la Virgen Maria》의 저자 미구엘 산체스는 과달루페의 성모화가 신약성서의 요한 묵시록 12장 1절에 나오는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로부터 12년 후, 마테오 데 라 크루즈는 “과달루페의 성모화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도상학적인 표현으로 드러내신 것이다.”라며 반론을 제기하였다. 1738년 미구엘 피카초는 과달루페의 성모화는 원죄 없으신 잉태의 “최고의 표현”이라고 설교하였다.
과달루페의 성모상은 실물 크기의 검은 머리에 올리브색 피부를 가진 젊은 여성이며, 머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눈은 아래를 향하며, 두 손을 기도하는 자세로 모으고 있다. 그녀는 꽃무늬로 장식된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허리 위에는 짙은 리본을 묶었으며, 전체적으로 푸른색과 녹색이 섞인 망토를 걸치고 있다. 망토는 금색으로 가장자리가 처리되어 있으며, 전체에 금색 별이 박혀 있다. 그녀는 초승달 위에 서 있는데, 이는 독수리 날개를 가진 천사가 받치고 있다.[57][58][59] 그녀는 금빛 햇살로 둘러싸여 있다.
과달루페의 성모의 도상은 전적으로 가톨릭적이다.[62] 1648년 논문 《성모 마리아의 형상》의 저자 미겔 산체스는 그녀를 신약성경의 요한 계시록 12장 1절에 나오는 "해를 입고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두 개의 별의 관을 쓴" 묵시록의 여인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무염시태의 표상으로 묘사된다.
버질 엘리존도는 이 이미지가 또한 그녀의 이미지를 그들의 다신교 신들과 연관시킨 멕시코 원주민들에게 여러 층의 의미를 지녔으며, 이는 그녀의 인기에 더욱 기여했다고 말한다.[63][64] 그녀의 청록색 망토는 신성한 부부 오메테쿠틀리와 오메시우아틀을 위해 남겨진 색깔이었고,[65] 그녀의 허리띠는 임신의 징후로 해석되며, 코스모스를 상징하고 ''나우이 올린''이라고 불리는 십자형 이미지가 이미지의 띠 아래에 새겨져 있다.[66] 그녀는 신성한 음료 풀케의 근원인 "아가베의 어머니"라고 불렸다.[67][68] 풀케는 또한 "성모의 젖"으로 알려졌다.[69] 그녀를 둘러싼 빛줄기는 마게이 가시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67]
4. 3. 기술적 분석
과달루페의 성모화는 흔히 우회적인 표현의 그림으로 해석된다. 성화에 새겨진 성모 마리아의 키는 145cm이다. 피부색은 인디언처럼 거무스름한 황갈색이고 머리카락은 검은색이다. 목에 건 십자가 목걸이는 스페인 선교사들이 선교한 가톨릭교회를 표시한다. 머리에서 발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외투는 밝은 청록색으로, 이 색은 거룩함을 뜻한다. 이 외투에는 세례와 새로운 생활을 상징하는 46개의 팔각의 별로 장식되어 있다. 또 성모 마리아는 금빛의 꽃무늬가 새겨진 엷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으며, 하얀 소매깃은 순교를 표시한다. 가슴 부근에 달린 검은색 리본은 토착민 전통에 의한 것으로 임산부를 의미한다.[134] 그리고 성모의 모습은 햇빛과 같은 금빛 광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형상은 마치 광선이 구름을 물리치는 듯하다. 또 악마를 상징하는 검은 초생달을 밟고 서 있는데, 그 밑에는 한 어린 천사가 성모의 옷자락을 떠받들고 있다. 성모의 얼굴은 아주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약간 홍조를 띤 두 볼과 아래를 내려다 보는 눈은 자비와 겸손을 드러내고 있다.[135][136]1648년 소책자 《Imagen de la Virgen Maria》의 저자 미구엘 산체스는 과달루페의 성모화가 신약성서의 요한 묵시록 12장 1절에 나오는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로부터 12년 후, 마테오 데 라 크루즈는 “과달루페의 성모화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도상학적인 표현으로 드러내신 것이다.”라며 반론을 제기하였다. 마찬가지로 1738년 미구엘 피카초는 과달루페의 성모화는 원죄 없으신 잉태의 “최고의 표현”이라고 설교하였다.

1979년 적외선을 이용해 형상을 조사한 미국 과학자들은 “사람의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칠감이나 붓질의 흔적이 전혀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과학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눈을 우주광학 기술로 2,500배 확대해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홍채와 동공에 동일 인물들이 비쳤기 때문이다. 후안 디에고가 틸마를 펼쳤던 순간과 몇몇 인디언 가족들이 보였다. 과학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눈은 즉석 사진기처럼 눈앞의 형상을 그대로 포착했다.”라고 밝혔다.
과달루페의 성모화는 현재 과달루페의 성모 대성당 안에 걸려 있다. 47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성모화의 섬유조직과 형태, 색감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137]
1887-88년에 그림에서 성모의 머리에 있던 12개의 점이 있는 왕관이 사라졌다. 이는 1888년 2월 23일에 그림이 인근 교회로 옮겨지면서 처음 발견되었다. 결국 한 화가가 임종 직전에 한 성직자의 지시로 왕관을 제거했다고 고백했다. 이는 금색 페인트가 왕관에서 벗겨져 낡아 보이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수 있다.
다른 왕관이 그림에 설치되었다. 1887년 2월 8일, 교황 레오 13세의 교황 칙서는 1895년 10월 12일에 있었던 그림의 교황 대관을 허가했다.[41]

과달루페의 성모상은 실물 크기의 검은 머리에 올리브색 피부를 가진 젊은 여성이며, 머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눈은 아래를 향하며, 두 손을 기도하는 자세로 모으고 있다. 그녀는 꽃무늬로 장식된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허리 위에는 짙은 리본을 묶었으며, 전체적으로 푸른색과 녹색이 섞인 망토를 걸치고 있다. 망토는 금색으로 가장자리가 처리되어 있으며, 전체에 금색 별이 박혀 있다. 그녀는 초승달 위에 서 있는데, 이는 독수리 날개를 가진 천사가 받치고 있다. 그녀는 금빛 햇살로 둘러싸여 있다.[57][58][59]
현재 틸마는 대략 1.72m x 1.07m 크기이며, 출처에 따라 몇 센티미터 차이가 있으며, 원래 크기에서 잘라낸 흔적이 보인다. 면실로 꿰매어 두 개의 천 조각으로 만들어졌다.[60] 이미지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 세로 균열과 작은 가로 균열이 있는데, 이는 이미지의 접힌 부분에서 발생했다.[70]
이 이미지는 현재 멕시코시티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의 주요 제단 위에 있는 금색 액자에 보관되어 있으며, 1976년 새 성당이 완공된 이후부터 그곳에 자리 잡고 있다.[61]
과달루페의 성모의 도상은 전적으로 가톨릭적이다.[62] 1648년 논문 《성모 마리아의 형상》의 저자 미겔 산체스는 그녀를 신약성경의 요한 계시록 12장 1절에 나오는 "해를 입고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두 개의 별의 관을 쓴" 묵시록의 여인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무염시태의 표상으로 묘사된다.
이미지와 ''틸마''는 수년에 걸쳐 여러 차례 조사되었다. 1785년, 청소원이 액자 오염을 제거하다가 실수로 질산을 뿌렸지만, 망토 부분은 무사했고 엷은 얼룩이 생기는 정도였다. 1921년에는 교회의 강한 영향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멕시코 대통령 비서실 직원 루시아노 페레스 카르비오가 성모상 바로 아래에서 폭탄을 폭발시켰다. 제단은 파괴되었지만 성모상은 무사했다고 한다.[133]
최근 조사에서는, 망토의 성모상 눈동자 부분에 디에고로 보이는 인물이 비쳐 보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4. 4. 눈에 대한 연구
1979년 적외선을 이용해 형상을 조사한 미국 과학자들은 “사람의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칠감이나 붓질의 흔적이 전혀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과학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눈을 우주광학 기술로 2,500배 확대해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홍채와 동공에 동일 인물들이 비쳤기 때문이다. 후안 디에고가 틸마를 펼쳤던 순간과 몇몇 인디언 가족들이 보였다. 과학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눈은 즉석 사진기처럼 눈앞의 형상을 그대로 포착했다.”라고 밝혔다.[137]최근 조사에서는, 망토의 성모상 눈동자 부분에 디에고로 보이는 인물이 비쳐 보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5. 가톨릭 교회에서의 과달루페
1662년, 멕시코시티 대성당의 성직자들은 12월 12일에 과달루페의 성모를 위한 전례를 요청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로마는 발현에 대한 정식 조사를 요청했고, 성직자들은 1665년부터 1666년까지 이 조사를 수행했으며, 1666년 3월에는 성화 조사를 포함했다.[127]
1666년 3월 13일, 일곱 명의 화가들이 부왕과 여러 성직자들을 동반하여 성화를 조사했다. 화가들은 "어떤 예술가도 ''틸마''만큼 거친 천에 이토록 아름답고 깨끗하며 잘 만들어진 작품을 그릴 수 없다"고 만장일치로 동의했으며,[128] 따라서 그 성화는 기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들은 또한 성화와 ''틸마''의 보존 상태와 ''틸마''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했다.[129] 3월 28일, 누에바에스파냐의 수석 의사 3명도 성화를 조사하여 현지 기후를 고려할 때 성화가 잘 보존된 것을 성화의 초자연적인 기원이라는 증거로 보았다.[130] 다만, 원래 성화에 추가되었던 달의 은색과 햇살의 금색은 희미해졌다.
1751년 4월 30일, 호세 데 이바라가 이끄는 화가 8명이 성상의 이미지를 검토했다. 1752년 4월 15일, 화가 중 한 명인 미겔 카브레라는 세 개의 복사본을 제작하기 위해 다시 이미지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1756년, 카브레라는 다른 화가들의 승인을 받아 자신의 성상에 대한 기록을 출판했는데, 그 제목은 ''아메리카의 경이''였다. 카브레라는 기후에도 불구하고 성상의 보존 상태를 언급했다. 그는 ''틸마''가 두 조각의 천으로 꿰매어져 있으며, 거친 ''마게이'' 섬유가 아닌 부드러운 ''아야테'' 섬유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네 가지 다른 회화 기법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이 기법들이 이전에 결합하여 사용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상에 사이징이 되어 있지 않아서, 당시 뒷면의 작은 부분을 제외하고는 은으로 덮여 있었지만 천의 뒷면을 통해 이미지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 교회는 과달루페의 성모에 대한 신앙이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의 아즈텍 여신 Tonantzin|토난친영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127] 성모가 발현한 언덕은 본래 토난친 여신 신앙의 중심지였다.[128] 그러나 교회는 인디오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쉽게 하기 위해 이처럼 고래의 종교가 기독교와 공존하는 것을 어느 정도 허용했다.[129][130]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는 성모에 의해 중병 환자가 회복되는 기적이 자주 일어나 성모에 대한 신앙이 점점 강해졌다.[127] 17세기에는 "갈색 피부의 성모"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의 신앙을 모았다.[128]
1537년, 로마 교황 바오로 3세는 인디오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식민지에서의 인디오에 대한 박해를 금지했다.
5. 1. 교황들의 선언
1754년 5월 25일,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교서 《Non est equidem》을 발표하여 과달루페의 성모를 뉴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고,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을 승인하였다.[127][128] 교황 레오 13세는 1891년에 새 성무일도를 승인하였으며, 1895년에 성화의 대관식을 장엄하게 거행하였다. 교황 성 비오 10세는 1910년에 과달루페의 성모를 라틴 아메리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1935년 교황 비오 11세는 과달루페의 성모를 필리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5년에 과달루페의 성모를 “멕시코의 여왕이자 아메리카 대륙의 여제”로 공표하였으며, 1946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명칭을 제정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1961년에 과달루페의 성모를 “아메리카 대륙의 어머니”라고 언급하며 그녀에게 전구를 청하였다. 1966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가 과달루페의 성모화를 보관하는 대성당에 황금 장미장을 수여하였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1월 31일에 교황으로서 첫 번째 사목 방문지로 과달루페를 선택하여 방문하였다. 1990년 5월 6일에는 후안 디에고를 시복하였다. 1992년에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과달루페의 성모 경당을 지어 축성하였다. 1999년 1월 22일, 요한 바오로 2세는 아메리카 주교회의의 요청을 받아들여 과달루페의 성모 축일을 아메리카 대륙 교회 전체의 전례 축일로 지정하였다. 2002년 7월 31일, 그는 후안 디에고의 시성식을 거행하였으며, 다음해에 성 후안 디에고(12월 9일)와 과달루페의 성모(12월 12일)를 로마 전례의 전례력에 기재하였다.
6. 멕시코의 상징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 문화적 상징이며, 교회와 민간 모두에게 널리 존경받고 있다. 19세기에는 '누에바에스파냐'라고 불리던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들의 단결을 위한 상징이 되었고, 그들은 이 성모 발현을 통해 자신들의 토착 멕시코 기원을 정당화한다고 여겼다.
과달루페의 성모를 주요 국가적 상징물로 처음 사용한 이는 미구엘 산체스이다. 그는 스페인어로 성모 발현 사건을 기술한 최초의 작가로, 과달루페의 성모를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묵시의 여인과 동일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 “동정 마리아께서는 투쟁을 통해 이곳 신대륙을 정복하셨다. 성모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하여 궁리 끝에 멕시코인의 모습으로 발현해 메시지를 전하심으로써 멕시코인들이 당신의 영향을 받기 쉽게 하셨으며, 그 덕분에 멕시코 땅이 그분께 정복될 수 있었다.”
1999년, 교회는 공식적으로 과달루페의 성모를 ''아메리카의 수호성인'', ''라틴 아메리카의 여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보호자''로 선포했다.[78]
또한 멕시코를 비롯한 스페인어권에서는 "과달루페"라는 이름은 여성 이름 또는 가톨릭 신자의 영명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후반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활약한 여성 화학자 복자 과달루페 오르티스 데 란다수리가 있다.[132]
6. 1. 멕시코 독립의 상징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 독립 전쟁 이후 멕시코 사람들의 국민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독립군은 항상 과달루페의 성모가 그려진 깃발 아래 모여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모든 멕시코 사람들을 상징하는 존재로 공인되었다.
1810년 미구엘 이달고 이 코스틸라는 “과달루페의 성모여, 영원하여라! 나쁜 정부와 가추피네스[138]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친 돌로레스의 외침으로 멕시코 독립을 위한 싸움에 나섰다. 이달고가 이끈 메스티소 토착민 군대는 과나후아토와 바야돌리드를 공격했을 당시, 과달루페의 성모 그림을 각기 다른 색으로 칠한 막대기와 리드 악기들 위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과달루페의 성모 그림이 들어간 모자를 착용하였다.
미구엘 이달고 사후 혁명의 지도력은 멕시코 남부에서 반군 부대를 이끌었던 메스티소 사제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에게 넘어갔다. 모렐로스는 과달루페를 칠판싱고 의회의 봉인으로 채택하고, 그녀의 축일을 칠판싱고 헌법에 새겨 넣었으며, 과달루페가 그의 승리 뒤에 있는 힘이라고 선언했다.
1912년,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농민 군대는 프란시스코 마데로 정부에 대항하여 남부에서 일어났다. 사파타의 반군 세력은 주로 토지 개혁에 관심이 있었지만—"tierra y libertad" (땅과 자유)가 봉기의 슬로건이었음—그의 농민 군대가 멕시코시티에 진입했을 때 그들은 과달루페의 깃발을 들고 갔다.[80]
시몬 볼리바르는 이 봉기에서 과달루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1815년 모렐로스의 처형 직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 독립 투쟁의 지도자들은 유명한 과달루페 성모를 애국자들의 여왕으로 선포하고, 어려울 때 그녀에게 기도하며, 그녀를 깃발에 전시함으로써 광신주의를 이용했다... 멕시코에서 이 이미지에 대한 존경은 가장 예리한 예언자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큰 경외심을 훨씬 능가한다.
성모는 멕시코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으며[129], 멕시코 독립 혁명의 지도자 미겔 이달고의 봉기 선언(돌로레스의 외침)에서는 "성모 만세"를 외쳤다. 멕시코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군대는 성모의 상을 모자에 달고 있었다.
과달루페의 성모에 대한 숭배가 강하여, 멕시코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자"로도 불리고 있다.[131]
6. 2. 멕시코 문화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 독립 전쟁 이후 멕시코 사람들의 국민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독립군은 항상 과달루페의 성모가 그려진 깃발 아래 모여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모든 멕시코 사람들을 상징하는 존재로 공인되었다.[138]
1810년 미구엘 이달고는 "과달루페의 성모여, 영원하여라! 나쁜 정부와 가추피네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멕시코 독립을 위한 싸움에 나섰다. 이달고가 이끈 군대는 과나후아토와 바야돌리드를 공격했을 당시, 과달루페의 성모 그림을 휘장으로 사용하고 모자에 부착하였다.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의 여왕",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성녀", "라틴 아메리카의 여제" 등으로 선포되었다.[42][43]
후안 디에고의 틸마는 멕시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 문화적 상징이 되었으며, 19세기에는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들의 단결을 위한 외침이 되었다. 그들은 이 발현이 자신들의 토착 멕시코 기원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성모는 멕시코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으며[129], 멕시코 독립 혁명의 지도자 미겔 이달고의 봉기 선언(돌로레스의 외침)에서는 "성모 만세"를 외쳤다. 멕시코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군대는 성모의 상을 모자에 달고 있었다.
과달루페의 성모에 대한 숭배가 강하여, 멕시코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자"로도 불리고 있다.[131]
또한 멕시코를 비롯한 스페인어권에서는 "과달루페"라는 여성 이름 또는 가톨릭 신자의 영명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후반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활약한 여성 화학자 복자 과달루페 오르티스 데 란다수리가 그 중 한 명이다.[132]
7. 대중 문화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 문화적 상징 중 하나이며, 멕시코인들의 신앙과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19세기에는 멕시코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들이 과달루페의 성모를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기고, 스페인에 대한 무장 반란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42][43]
1921년, 반가톨릭 세속주의자가 꽃바구니 안에 숨겨 둔 폭탄이 폭발하여 바실리카 제단이 훼손되었으나, 틸마는 손상되지 않았다. 폭발로 휜 놋쇠 십자가는 현재 성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신자들은 이를 기적으로 여기고 있다.
과달루페 성모상은 여러 차례 과학적 조사를 받았다. 1787년 조사에서는 야자 섬유로 만들어졌다고 결론 내렸지만, 이후 아마와 대마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성모상에 여러 차례 수정과 덧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982년 조사에서는 성모상이 그려지기 전 흰색 페인트로 바탕 처리가 되었으며, 다양한 천연 안료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성모상의 눈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후안 디에고가 주교 앞에서 틸마를 펼쳤을 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서 발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으며, 잉크 반점을 보는 것과 같다는 비판도 있다.
7. 1. 문학과 영화
후안 디에고의 틸마는 멕시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 문화적 상징이 되었으며, 널리 교회와 민간의 존경을 받았다. 19세기에는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들이 '누에바에스파냐'라고 칭했던 곳에서 단결을 위한 외침이 되었다. 그들은 이 발현이 자신들의 토착 멕시코 기원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거의 메시아적인 사명감과 정체성을 부여하여 스페인에 대한 무장 반란을 정당화했다.문학에서 이미지와 그 전신으로 추정되는 아즈텍의 대지의 여신 토난친에 대한 주목할 만한 언급은 샌드라 시스네로스의 단편 소설 "작은 기적들, 지켜진 약속들"("Little Miracles, Kept Promises", 1991)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스네로스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과달루페 성모에게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짧은 메모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스네로스의 손에서 이는 텍사스 전역에 걸쳐 사는 확장된 치카노 공동체의 초상화가 된다. "작은 기적들"은 페미니스트 예술가 로사리오 "차요" 데 레온에 대한 긴 서사로 끝을 맺는데, 그녀는 처음에 라 비르헨 데 과달루페의 이미지를 복종과 고통, 특히 멕시코 여성에 연관시켜 집에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달루페의 성지가 아즈텍의 대지의 여신이자 뱀을 파괴하는 자인 토난친의 신전이 있던 멕시코시티의 같은 언덕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차요는 아즈텍 여신과 멕시코 성녀 사이에 깊고, 공생적인 연결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 둘은 차요의 새로운 예술적 창의성, 내면의 힘, 독립심을 고취시킨다. 차요는 "나는 마침내 당신이 누구인지 이해했어요. 더 이상 온순한 마리아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 토난친이시죠. 그녀의 사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테페약의 당신의 교회."라고 말한다.[114]
이미지와 그 발현은 팀 왓킨스가 감독한 2013년 다큐멘터리 ''피와 장미''(The Blood & The Rose)를 포함하여 여러 차례 조사되었다.[115]
7. 2. 시각 예술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 문화적 상징 중 하나로, 멕시코인들의 신앙과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존재이다. 19세기에는 멕시코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들이 과달루페의 성모를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기고, 스페인에 대한 무장 반란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42][43]

1921년, 반가톨릭 세속주의자가 폭탄 테러를 일으켜 성모상이 훼손될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이 사건은 과달루페 성모 신앙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과달루페 성모상은 여러 차례 과학적인 조사를 받았다. 1787년 조사에서는 성모상이 야자 섬유로 만들어졌다고 결론 내렸지만, 이후 조사에서는 아마와 대마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성모상에 여러 차례 수정과 덧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982년 조사에서는 성모상이 그려지기 전에 흰색 페인트로 바탕 처리가 되었으며, 다양한 천연 안료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성모상의 눈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성모의 눈에서 후안 디에고가 주교 앞에서 틸마를 펼쳤을 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으며, 잉크 반점을 보는 것과 같다는 비판도 있다.
최근 치카노 예술가들은 과달루페 성모를 여성의 힘과 원주민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존재로 재해석하여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종교적인 신성성을 훼손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116][117][118] 알마 로페스의 디지털 콜라주 ''우리 성모(Our Lady)''는 대표적인 논란 사례이다.[119][120][1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욜란다 로페스, 알마 로페스, 마르가리타 '미타' 쿠아론, 에스테르 에르난데스, 콘수엘로 히메네스 언더우드 등의 치카노 예술가들은 과달루페 성모를 통해 억압, 여성의 힘, 여성의 지위 향상과 같은 주제를 꾸준히 탐구하고 있다.[122][123]
8. 논쟁 및 비판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의 여왕",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성녀", "라틴 아메리카의 여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보호자"로 선포되었다.[42][43] 199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마지막 두 칭호를 부여했다.
1921년, 반가톨릭 세속주의자가 꽃바구니에 폭탄을 숨겨 틸마 아래에 놓아두었다. 폭발로 바실리카 제단이 훼손되었지만, 틸마는 손상되지 않았다. 폭발로 휜 놋쇠 십자가는 현재 성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신자들은 이를 기적으로 믿는다.
후안 디에고의 틸마는 멕시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 문화적 상징이 되었으며, 19세기에는 '누에바에스파냐'라고 칭했던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들의 단결을 위한 외침이 되었다. 그들은 이 발현이 자신들의 토착 멕시코 기원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여겼으며, 스페인에 대한 무장 반란을 정당화했다.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과달루페''는 가톨릭 멕시코인들의 상징으로, 1648년 비전에 대한 최초의 출판된 기록을 저술한 미겔 산체스는 과달루페를 ''요한계시록''의 묵시록의 여인으로 식별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멕시코 역사에서 과달루페의 이름과 이미지는 국가 통합의 상징이었다. 초대 멕시코 대통령 과달루페 빅토리아는 과달루페 성모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변경했다.[79] 미겔 이달고 신부와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각각 멕시코 독립 전쟁 (1810)과 멕시코 혁명 (1910)에서 과달루페의 성모 이미지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군대를 이끌었다.[77] 1999년, 교회는 공식적으로 그녀를 ''아메리카의 수호성인'', ''라틴 아메리카의 여제'',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보호자''로 선포했다.[78]
1810년,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틸라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죽음을, 과달루페의 성모 만세!"를 외치며 멕시코 독립을 시작했다. 이달고가 사망한 후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혁명의 지도력을 이어받았다. 모렐로스는 과달루페를 칠판싱고 의회의 봉인으로 채택하고, 그녀의 축일을 칠판싱고 헌법에 새겨 넣었으며, 과달루페가 그의 승리 뒤에 있는 힘이라고 선언했다. 시몬 볼리바르는 독립 투쟁에서 과달루페 성모가 깃발에 전시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1912년,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농민 군대는 프란시스코 마데로 정부에 대항하여 남부에서 일어났다. 사파타의 반군 세력은 토지 개혁에 관심이 있었지만, 멕시코시티에 진입했을 때 과달루페의 깃발을 들고 갔다.[80]
해링턴은 아즈텍인들이 스페인인들에 의해 파괴된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상징 체계 대신 과달루페의 이미지가 그 목적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과달루페라는 이름은 1531년 멕시코시티 외곽 언덕에 성모가 나타났을 때 성모 자신이 선택했다고 한다. 과달루페는 멕시코를 형성하기 위해 융합된 문화, 인종적, 종교적인 혼합물이며, "첫 번째 메스티소", 또는 "첫 번째 멕시코인"으로서 정체성을 확증한다.
멕시코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과달루페 성모를 믿지 않고서는 진정한 멕시코인으로 간주될 수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옥타비오 파스는 1974년에 "멕시코 국민은 ... 과달루페 성모와 공공 지원을 위한 국립 복권만을 믿는다."라고 썼다.
8. 1.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문
가톨릭 교회 내부[47] 및 외부의 회의론자들은 과달루페의 성모에 대한 기록의 역사적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해 왔으며, "후안 디에고 이야기의 거의 모든 측면이 의문시되었다"고 한다.[48] 특히, 성모 발현에 대한 현존하는 문서 증거는 없다.[49] 주요 자료인 ''Huei tlamahuiçoltica''는 1649년에 출판되었으며, 집필 시기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과달루페 이미지에 대한 공식 조사는 1556년에 이루어졌으나, 이 전설이나 중심 인물인 후안 디에고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50] 이는 ''Huei tlamahuiçoltica''와 그 전설이 1556년 이후에 기원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인용된다.[51] 1556년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 이미지는 전년도에 한 원주민 예술가에 의해 그려졌다고 하며,[52][53] 이는 1531년의 초자연적 기원 가설과 직접적으로 모순된다.9. 기타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와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도 숭배받고 있다.[93]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9년 과달루페의 성모를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보호자"로 선포했고,[42][43] 이는 낙태 반대 운동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한다.[94][95][96]
1921년에는 반가톨릭 세속주의자가 틸마 아래에 폭탄을 설치했지만, 틸마는 손상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많은 신자들에게 기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역대 교황들은 과달루페의 성모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경의를 표했다.
교황 | 주요 행적 |
---|---|
교황 베네딕토 14세 | 1754년 교황 칙서를 통해 과달루페의 성모를 스페인령 중앙 및 북아메리카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고, 전례문을 포함시켰다.[97] |
교황 레오 13세 | 1895년 멕시코 원본 성화에 대한 대관 칙령을 승인했다.[97] |
교황 비오 10세 | 1910년 과달루페의 성모를 멕시코 공화국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98] |
교황 비오 12세 | 1945년 라디오 연설에서 성화를 언급했다.[99] |
교황 바오로 6세 | 1966년 성화에 황금 장미를 수여했다.[100]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1979년 교황으로 선출된 후 처음으로 과달루페 성지를 방문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101][102][103] 1992년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경당을 봉헌했고, 2002년에는 12월 12일을 선택 기념으로 로마 일반 전례력에 포함시켰다.[104][105] |
교황 프란치스코 | 2013년 두 번째 황금 장미를 성화에 수여했고,[106] 2016년에는 새로운 황금 왕관을 수여했다.[107] |
후안 디에고가 성모를 목격한 테페약 언덕(테페야크라고도 함)에는 과달루페 대성당(Basílica de Nuestra Señora de Guadalupees)이 세워져 있다.[133] 과달루페 성모상은 오랜 시간 동안 성당에 보관되었지만 퇴색되지 않았고, 1785년 질산에 의한 손상과 1921년 폭탄 테러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133]
9. 1. 숭배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의 여왕",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성녀", "라틴 아메리카의 여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보호자"로 선포되었다. 특히,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보호자"라는 칭호는 199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부여되었다.[42][43]1921년 11월 14일, 반가톨릭 세속주의자가 꽃바구니 안에 숨겨 틸마 아래에 놓아둔 폭탄이 폭발했지만, 틸마는 손상되지 않았다. 폭발로 휜 놋쇠 십자가는 현재 성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신자들은 이를 기적으로 믿고 있다.
1662년, 멕시코시티 대성당의 성직자들은 과달루페의 성모를 위한 전례를 요청하는 과정을 시작했고, 1665년부터 1666년까지 발현에 대한 정식 조사를 수행했다. 1666년 3월에는 성화 조사를 포함했다.
1666년 3월 13일, 일곱 명의 화가들이 성화를 조사한 결과, "어떤 예술가도 ''틸마''만큼 거친 천에 이토록 아름답고 깨끗하며 잘 만들어진 작품을 그릴 수 없다"고 결론 내리며 성화가 기적이라고 판단했다. 1751년 4월 30일, 호세 데 이바라가 이끄는 화가 8명이 성상의 이미지를 검토했다. 1756년, 미겔 카브레라는 다른 화가들의 승인을 받아 자신의 성상에 대한 기록인 ''아메리카의 경이''를 출판했다. 카브레라는 기후에도 불구하고 성상의 보존 상태가 좋으며, ''틸마''가 거친 ''마게이'' 섬유가 아닌 부드러운 ''아야테'' 섬유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네 가지 다른 회화 기법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과달루페 성모의 성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가톨릭 순례지 중 하나이다. 2009년 12월 11일부터 12일에는 610만 명의 순례객이 멕시코시티의 과달루페 대성당을 방문했다.[91]
과달루페 성모는 멕시코와 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도 숭배받고 있다.[93] 마리아가 임신한 어머니로 나타나고 발현에서 모든 이의 어머니로 주장하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며 낙태 반대 운동의 일반적인 이미지로 사용된다.[94][95][96]
역대 교황들은 과달루페 성모를 공경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헌신을 표명했다.
교황 | 주요 행적 |
---|---|
교황 베네딕토 14세 | 1754년 5월 25일, 교황 칙서 Non est Equidem을 통해 과달루페의 성모를 당시 "새 스페인"으로 불리던 스페인령 중앙 및 북아메리카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고, 그녀를 기리는 가톨릭 미사와 로마 성무일도에 사용할 전례문을 포함시켰다.[97] |
교황 레오 13세 | 1887년 2월 8일, 멕시코 원본 성화에 대한 대관 칙령을 승인했고, 이는 1895년 10월 12일에 거행되었다.[97] |
교황 비오 10세 | 1910년 6월 16일, 추기경 라파엘 메리 델 발이 서명하고 공증한 칙서 Gratia quae를 통해 과달루페의 성모를 멕시코 공화국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98] |
교황 비오 12세 | 1945년 10월 12일, 대관 50주년을 기념하는 라디오 연설에서 존경받는 성화에 대해 언급했다.[99] |
교황 바오로 6세 | 1966년 3월 20일, 성화에 황금 장미를 수여하고, 추기경 카를로 콘팔로니에리를 자신의 교황 사절로 임명하여 1966년 5월 31일 대성당에서 이를 전달하도록 했다.[100]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1979년 1월 27일, 교황으로 선출된 후 첫 번째 여행으로 과달루페 성지를 방문했다. 그는 이 성지를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었다.[101][102] 그는 1990년, 1999년, 2002년에 다시 방문했다.[103] 1992년 5월 12일,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동굴에 동명의 경당을 봉헌했다.[104] 2002년 9월 28일, 이 마리아 칭호의 전례 축일을 12월 12일의 선택 기념으로 로마 일반 전례력에 포함시켰다.[105] |
교황 프란치스코 | 2013년 11월 18일, 추기경 마르크 웰레를 통해 두 번째 황금 장미를 성화에 수여하여 대성당에서 전달하도록 했다.[106] 2016년 2월 13일 대성당에 대한 사도적 방문 동안 성화에 새로운 황금 왕관을 수여했다.[107] |
9. 2. 과달루페 사원
디에고가 성모를 목격한 멕시코시 근교의 테페약 언덕(테페야크라고도 함)에는 거대한 과달루페 대성당(Basílica de Nuestra Señora de Guadalupees)이 세워졌다.[133]과달루페의 성모상은 오랜 세월 동안 성당에 걸려 있지만,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 1785년, 청소원이 액자 오염을 제거하다가 실수로 질산을 뿌렸지만, 망토 부분은 무사했고 엷은 얼룩이 생기는 정도였다. 1921년에는 교회의 강한 영향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멕시코 대통령 비서실 직원 루시아노 페레스 카르비오가 성모상 바로 아래에서 폭탄을 폭발시켰다. 제단은 파괴되었지만 성모상은 무사했다.[133]
참조
[1]
웹사이트
Iglesia Episcopal Anglicana de Chile
https://www.instagra[...]
2023-12-13
[2]
뉴스
World's Most-Visited Sacred Sites
http://www.traveland[...]
Travel and Leisure
2012-01
[3]
웹사이트
"Shrine of Guadalupe Most Popular in the World", ''Zenit'', June 13, 1999
http://www.ewtn.com/[...]
2009-06-12
[4]
문서
English translation of the ''Nican Mopohua''
https://web.archive.[...]
[5]
서적
The Story of Guadalupe: Luis Laso de la Vega's ''Huei tlamahuiçoltica'' of 1649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6]
문서
This apparition is somewhat elided in the ''Nican Mopohua'' but is implicit in three brief passages (Sousa et al., pp. 75, 77, 83). It is fully described in the ''Imagen de la Virgen María'' of Miguel Sánchez published in 1648.
[7]
문서
The date does not appear in the ''Nican Mopohua'', but in Sanchez's ''Imagen''.
[8]
문서
The procession and miracle are not part of the ''Nican Mopohua'' proper, yet introduce the ''Nican Mopectana'' that immediately follows the ''Nican Mopohua'' in the ''Huei Tlamahuiçoltica''.
[9]
웹사이트
Dysinger, Luke. "The Virgin Mary in Art", St. John's Seminary, Camarillo
http://ldysinger.stj[...]
2020-08-17
[10]
논문
Santiago, Guadalupe, Pilar: Spanish Shrines/Spanish Names
https://ans-names.pi[...]
2024-01-02
[11]
서적
Representations of the Blessed Virgin Mary in World Literature and Art
Lexington Books
[12]
뉴스
Our Lady of Guadalupe in Spain
http://swco.ttu.edu/[...]
Our Lady in the Old World and New, Medieval Southwest, Texas Tech University
[13]
문서
Castaño, Victor Manuel: coordinador general, "Estudio físico-químico y técnico del códice 1548", Colección Privada Herdez (1997); ''Ciencia Hoy'', "La detectivesca ciencia de los documentos antiguos: el caso de códice 1548", (a) April 29, (b) May 6, and (c) May 13, 2008
[14]
웹사이트
Códice 1548 o "Escalada"
http://basilica.mxv.[...]
Inigne y Nacional Basílica de Santa María de Guadalupe
[15]
논문
El Códice 1548: Crítica a una supuesta fuente Guadalupana del Siglo XVI
http://www.proyectog[...]
Proyecto Guadalupe
2006-12-01
[16]
논문
The Oldest Copy of the Nican Mopohua
Center for Applied Research in the Apostolate (Georgetown University)
[17]
서적
Destierro de sombras : luz en el origen de la imagen y culto de Nuestra Señora de Guadalupe del Tepeyac
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
[18]
문서
Robert Ricard, ''The Spiritual Conquest of Mexico''. Translated by Lesley Byrd Simpso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6, p. 188.
[19]
서적
Nuevos testimonios históricos guadalupanos
https://books.google[...]
Fondo de Cultura Económica
2013-05-25
[20]
문서
Ricard, ''Spiritual Conquest'', p. 189.
[21]
간행물
The Virgin of Guadalupe
2017-06-22
[22]
문서
J. Nickell, "Image of Guadalupe: myth – perception". ''Skeptical Inquirer'' 21:1 (January/ February 1997), p. 9.
[23]
문서
Jody Brant Smith, ''The image of Guadalupe'', Mercer University Press, 1994, p. 73.
[24]
문서
Francis Johnston, ''The Wonder of Guadalupe,'' TAN Books, 1981, p. 47
[25]
문서
Ricard, ''Spiritual Conquest'', p. 190.
[26]
서적
The Oxford History of Mexico
Oxford University Press
[27]
문서
Bernardino de Sahagún, ''Florentine Codex: Introduction and Indices'', Arthur J.O. Anderson and Charles Dibble, translators. Salt Lake City: University of Utah Press, 1982, p. 90.
[28]
문서
L. Burkhart (2001). ''Before Guadalupe: the Virgin Mary in early colonial Nahuatl literature.''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29]
웹사이트
Insigne y Nacional Basílica de Santa María de Guadalupe
http://basilica.mxv.[...]
2017-12-05
[30]
서적
The Story of Guadalupe: Luis Laso de la Vega's ''Huei tlamahuiçoltica'' of 1649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31]
문서
Story of the manuscript
https://digitalcolle[...]
[32]
서적
Tonantzin Guadalupe : pensamiento náhuatl y mensaje cristiano en el "Nicān mopōhua"
Colegio Nacional: Fondo de Cultura Económico
[33]
문서
Anales de Juan Bautista Folio 6r
[34]
문서
Cartas Sobre la Tradición de Ntra. Sra. de Guadalupe de México, Servando Teresa De Mier 1797 p. 53
[35]
서적
Our Lady of Guadalupe: The Origins and Sources of a Mexican National Symbol, 1531–1797
University of Arizona Press
2017
[36]
서적
Informaciones sobre la milagrosa aparicion de la santisima Virgin de Guadalupe, recibidas en 1666 y 1723
http://catalog.hathi[...]
Imp. católica
1889
[37]
웹사이트
Guadalupe; Informaciones jurídicas de 1666
http://www.enciclope[...]
[38]
웹사이트
Informaciones de 1666
http://luxdomini.net[...]
2015-12-08
[39]
웹사이트
Vicaría de Guadalupe. Antecedentes históricos. Antigua Basílica de Santa María de Guadalupe
http://www.arquidioc[...]
2021-11-17
[40]
웹사이트
Virgen de Guadalupe con las cuatro apariciones y una vista del Santuario de Tepeyac
https://artsandcultu[...]
[41]
문서
Enciclopedia Guadalupana
[42]
웹사이트
Virgen de Guadalupe
http://www.mariologi[...]
Mariologia.org
2012-08-13
[43]
웹사이트
Britannica.com
https://www.britanni[...]
[44]
서적
Mexico Today: An Encyclopedia of Life in the Republic
https://books.google[...]
ABC-CLIO
2012
[45]
웹사이트
Daily Catholic
http://www.dailycath[...]
2006-11-30
[46]
서적
Juan Diego y las Apariciones el pimo Tepeyac
[47]
뉴스
Our Lady of Guadalupe
https://www.britanni[...]
Encyclopedia Britannica
2024-05-17
[48]
서적
The Encyclopedia of Religious Phenomena
Visible Ink Press
2007
[49]
뉴스
Our Lady of Guadalupe
https://www.britanni[...]
Encyclopedia Britannica
2024-05-17
[50]
서적
The Image of Guadalupe: Myth of Miracle?
Doubleday
1983
[51]
간행물
The Image of Guadalupe: A Folkloristic and Iconographic Investigation
1985
[52]
서적
Camera Clues: A Handbook for Photographic Investigation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5
[53]
서적
Quetzalcoatl and Guadalupe: The Formation of Mexican National Consciousness, 1531-1813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54]
웹사이트
"Nican Mopohua: Here It Is Told,"
http://weber.ucsd.ed[...]
UC San Diego
2011-11-21
[55]
서적
Our Lady of Guadalupe: Mother of the Civilization of Love
Doubleday
2009
[56]
서적
Christianity in Latin America: A Histo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57]
서적
The Image of Guadalupe: Myth or Miracle?
https://archive.org/[...]
Doubleday & Company, Inc.
1983
[58]
서적
Our Lady of Guadalupe: The Painting, the Legend and the Reality
https://archive.org/[...]
McFarland and Company, Inc.
2006
[59]
서적
Our Lady of Guadalupe: Mother of the Civilization of Love
https://archive.org/[...]
Doubleday Religion
2009
[60]
논문
Creating the Virgin of Guadalupe: The Cloth, the Artist, and Sources in Sixteenth-Century New Spain
https://www.jstor.or[...]
2005-04
[61]
서적
Sacred Places of a Lifetime
https://archive.org/[...]
2008
[62]
논문
Our Lady of Guadalupe and Eucharistic Adoration
[63]
서적
Guadalupe, Mother of a New Creation.
Orbis Books
1997
[64]
웹사이트
A short history of Tonantzin, Our Lady of Guadalupe
https://www.indianco[...]
2019-03-04
[65]
웹사이트
UTPA.edu
http://www.utpa.edu/[...]
2006-11-30
[66]
서적
Tonantzin Guadalupe
https://books.google[...]
Editorial Progreso
1997
[67]
서적
Drinking, Homicide, and Rebellion in Colonial Mexican Villages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68]
웹사이트
What is Pulque?
https://delmaguey.co[...]
2020-10-13
[69]
논문
La Virgen de Guadalupe as Surrogate Mother in San Juan Aztingo
[70]
간행물
Un restaurador de la guadalupana expone detalles técnicos que desmitifican a la imagen
https://www.proceso.[...]
2002-07-27
[71]
서적
Our Lady of Guadalupe: Faith and Empowerment among Mexican-American Wome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4
[72]
간행물
El análisis que ocultó el Vaticano
https://www.proceso.[...]
2002-05-18
[73]
서적
The Image of Guadalupe: Myth or Miracle
https://archive.org/[...]
Doubleday & Company, Inc.
1983
[74]
서적
The Science of Miracles: Investigating the Incredible
https://archive.org/[...]
Prometheus Books
2013
[75]
문서
Our Lady of Guadalupe: The Origins and Sources of a Mexican National Symbol, 1531–1797
1995
[76]
문서
Shrines and Miraculous Images: Religious Life in Mexico Before the Reforma
2011
[77]
서적
Open Veins of Latin America: Five Centuries of the Pillage of a Continent
1997-01
[78]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Music and World Christianitie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79]
문서
Mexico, Biography of Power. A History of Modern Mexico 1810–1996
HarperCollins: New York
1997
[80]
Youtube
Documentary footage of Zapata and Pancho Villa's armies entering Mexico City
https://www.youtube.[...]
[81]
웹사이트
Zapatistas Guadalupanos and the Virgin of Guadalupe
https://web.archive.[...]
2006-12-11
[82]
논문
Mother of Death, Mother of Rebirth: The Mexican Virgin of Guadalupe
1988
[83]
웹사이트
Why the name 'of Guadalupe'?
http://www.sancta.or[...]
2006-11-30
[84]
웹사이트
Our Lady of Guadalupe. A Guide for the New Millennium
http://www.americanc[...]
2006-12-03
[85]
뉴스
"'Undocumented Virgin.' Guadalupe Narrative Crosses Borders for New Understanding."
Episcopal News Service
2004-12-10
[86]
논문
The Virgin of Guadalupe and the Economics of Symbolic Behavior
1989
[87]
문서
Quetzalcoatl and Guadalupe. The Formation of Mexican National Consciousnes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6
[88]
뉴스
La Virgen de Guadalupe - Mother of all Mexico
https://www.mexconne[...]
2020-05-29
[89]
문서
Guadalupe Cult ... In the Lives of Mexicans
1996
[90]
서적
Quetzalcoatl and Guadalupe: The Formation of Mexican National Consciousness, 1531–1813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91]
웹사이트
http://www.zenit.org[...]
[92]
서적
The Church in Act: Lutheran Liturgical Theology in Ecumenical Conversation
Fortress Press
[93]
웹사이트
Our Lady of Guadalupe | Description, History, & Facts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94]
웹사이트
The Patroness of the Unborn: Our Lady of Guadalupe
https://www.hli.org/[...]
2012-12-13
[95]
웹사이트
Knots in Mary's Garments : University of Dayton, Ohio
https://udayton.edu/[...]
[96]
웹사이트
Goan Churches | Information on all Churches in Goa
http://goanchurches.[...]
[97]
서적
Image and Pilgrimage in Christian Culture
Columbia University Press
[98]
웹사이트
Gratiae, quae
https://www.vatican.[...]
1910-06-16
[99]
웹사이트
Radiomensaje de Su Santidad Pío XII a los fieles mexicanos en el 50 aniversario de la coronación canónica de la Virgen de Guadalupe
https://www.vatican.[...]
1945-10-12
[100]
웹사이트
Radiomensaje del Santo Padre Pablo VI con motivo de la entrega de la Rosa de Oro a la Basílica de Nuestra Señora de Guadalupe
https://www.vatican.[...]
1966-05-31
[101]
서적
Pope John Paul II: A Life in Pictures
https://archive.org/[...]
powerHouse Books
2005
[102]
서적
Mother of the Americas
https://archive.org/[...]
Aquinas Press
1993
[103]
서적
Catholic Dictionary
https://books.google[...]
Image Books
2013
[104]
웹사이트
Tiene Virgen de Guadalupe lugar único en el Vaticano
https://www.elsiglod[...]
2007-03-13
[105]
서적
Notitiae
http://www.cultodivi[...]
2004
[106]
웹사이트
Pope Francis sends golden rose to Our Lady of Guadalupe
https://www.catholic[...]
2013-11-22
[107]
웹사이트
Pope Caps First Day in Mexico Visiting With Our Lady of Guadalupe
https://aleteia.org/[...]
Aleteia
2016-02-14
[108]
컨퍼런스
The Virgin, the Priest, and the Flag: Political Mobilization of Mexican Immigrants in Chicago, Houston, and New York
https://escholarship[...]
2004-04-15
[109]
서적
Mexican American Religions: Spirituality, Activism, and Culture
Duke University Press
2008
[110]
서적
Guadalupe in New York: Devotion and the Struggle for Citizenship Rights Among Mexican Immigrants
NYU Press
2010
[111]
논문
Holy Activist, Secular Saint: Religion and the Social Activism of César Chávez.
berkeley.primo.exlib[...]
Duke University Press
2008
[112]
웹사이트
Research Guides: A Latinx Resource Guide: Civil Rights Cases and Events in the United States: 1962: United Farm Workers Union
https://guides.loc.g[...]
[113]
논문
Globalization and Chicana Politics of Representation.
berkeley.primo.exlib[...]
Palgrave Macmillan US
[114]
서적
Little Miracles, Kept Promises.
Random House
1991
[115]
영화
The Blood & the Rose
[116]
논문
Tonanlupanisma: Re-Membering Tonantzin-Guadalupe in Chicana Visual Art.
2008
[117]
서적
Sacred Iconographies in Chicana Cultural Productions
Palgrave Macmillan
2013
[118]
서적
Chicana Art : the Politics of Spiritual and Aesthetic Altarities
Duke University Press
2007
[119]
웹사이트
Depiction of the Virgin of Guadalupe Stirs Objections
https://www.latimes.[...]
2001-04-04
[120]
서적
Our Lady of Controversy: Alma López's Irreverent Apparition
University of Texas Press
2011
[121]
웹사이트
Our Lady of Guadalupe is a powerful symbol of Mexican identity
https://www.nbcnews.[...]
2016-12-12
[122]
논문
WOMEN WHO MAKE THEIR OWN WORLDS: THE LIFE AND WORK OF ESTER HERNÁNDEZ.
http://www.jstor.org[...]
University of Texas Press
2018
[123]
논문
Yolanda Lopez: Breaking Chicana Stereotypes.
1994
[124]
문서
国本 (2002) で確認した表記。
[125]
문서
落合 (1999) で確認した表記。
[126]
문서
グリュジンスキ (1992) で確認した表記。
[127]
문서
グリュジンスキ (1992), p. 121.
[128]
문서
落合 (1999), p. 127.
[129]
문서
国本 (2002), pp. 81-82.
[130]
웹사이트
A short history of Tonantzin, Our Lady of Guadalupe
https://www.indianco[...]
2019-03-20
[131]
웹사이트
アメリカ大陸の保護者、グアダルーペの聖母の祝日、教皇によるミサ
http://www.archivior[...]
2021-05-18
[132]
웹사이트
生涯
https://opusdei.org/[...]
2021-05-18
[133]
간행물
聖母マリア
日経ナショナル ジオグラフィック社
2015-12
[134]
웹인용
A short history of Tonantzin, Our Lady of Guadalupe
https://www.indianco[...]
2019-03-20
[135]
웹인용
성모님의 모습
http://www.guadalupe[...]
2008-12-20
[136]
링크
http://koreamcss.com[...]
[137]
뉴스
"[특집] 라틴아메리카의 어머니, 과달루페 성모를 찾아서"
http://web.pbc.co.kr[...]
평화신문
2007-12-09
[138]
문서
‘말에 박차를 가하는 놈들’이라는 뜻의 스페인어로 스페인에서 온 이주민들을 경멸적인 의미로 지칭하는 말이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